여순사건 피해자 안삼순 할아버지

여순사건이 내 고향 여수에서 시작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외면하면서 살았다. 어떻게 해서 일어난 사건이며 왜 그리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해야 했는지 늘 궁금했다. 같은 지역에 사는 구성원으로서 곳곳에 남아 있는 피해 흔적과 피해자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었다.

여순사건 유족 중에 한분을 만나기 위해 매곡동에 있는 여순사건 순천유족회 사무실을 찾아갔다.

▲ 여순사건 피해자 안삼순 할아버지
할아버지께 인터뷰 요청을 했더니 처음에는 거절했다.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괴롭더라도 그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아픔을 나누었으면 해서 다시 부탁했더니 인터뷰에 응해 주셨다.

보성군 득량면이 고향인 안삼순(83세) 할아버지는 보성에서 혼자 살고 계신다. 할머니는 14년 전에 돌아가셨고, 자녀들은 다른 곳에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1949년 큰형이 반란군에게 잡혀가서 산에서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다 1949년 5월 18일에 정흥리 마을 뒷산에서 득량지서 경찰들에게 쫓기다가 보성에서 넘어오는 경찰들과 양동작전에 걸려 총살되었다. 그날 할아버지는 논에 모를 심고 쉬고 있는데 경찰들이 마을 주민들을 다 모아놓고 백인재에 시신이 있으니 묻으라고 해서 가 보았더니 총을 맞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옆으로 누워있었다. 가까이 가서 형의 얼굴을 확인하고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작은 형은 1949년 음력 7월 17일 보성읍 원봉리 산에서 경찰들 합동작전에 10여명 이상의 사람들과 함께 잡혀 총살되어 집단 매장되었다. 원봉리에 사는 고모가 시신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못 찾았다고 한다. 농사를 짓는 형님 둘을 잃은 할아버지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도 하마터면 죽을 뻔 했지. 우연히 멀리서 어머니가 잡혀가는 걸 보고 잠시 산으로 도망가서 잡혀 가지 않았는데, 그때 잡혔더라면 영락없이 죽었을 거야.”

어머니 이애순은 한국전쟁이 나고 음력 6월 7일에 덕고개에서 새끼줄로 손을 뒤로 묶인 채  80여명 이상의 사람들과 함께 총살을 당했다. 어머니는 형들이 반란군에 잡혀가서 죽었다는 이유로 경찰이 보도연맹에 가입을 시켜서 변을 당했다. 당시에는 좌익진영의 사람에게 물 한 그릇만 떠 주어도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고 한다.
 

억울한 누명을 쓰다

“갑자기 집을 불 지르는 바람에 옷 하나 못 건졌어. 산 것이 산 것도 아니었고, 참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시피 하고 살았지요.”

할아버지는 11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 18살인 할아버지는 식구 셋을 잃고 누이동생과 둘이서만 살게 되었다.

한국전쟁 직후 한참 강제로 징집할 당시, 할아버지는 10년 넘게 피해 다녔다. 군대에 가서 죽으면 혼자 남을 누이동생 걱정에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밤이면 산에 숨어 지내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가 결국 30살에 신체검사를 받고 예비군으로 편성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무엇인지 물었다.
“가족들이 누명을 쓰고 희생당한 것도 억울한데 우리보다 빨갱이 물이 들었다고 그래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죽은 사람들은 빨갱이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잘 안된다고 한다. 너무 끔찍하여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으리라.

  “또 힘들었던 것은 보릿고개였어요. 그해 여름 장마가 들어서 베어 놓은 보리나 밭에 있는 보리나 다 썩는 바람에 먹을 게 없어서 풀만 뜯어다가 끓여 먹으니까 사람이 띵띵 부어. 칡뿌리 캐다 삶아 먹고, 송구 알아요? 소나무 속껍질이 송구인데 그걸 벗겨서 찧어 밥을 해 먹는데 독해. 그래도 안 죽을라고 한 숟가락 떠먹고 돌아다니고, 안 해 먹은 게 없지요.”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을 하고, 가파른 보릿고개를 간신히 넘어가며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6남매 공부를 가르치고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 올해부터는 힘에 부쳐 농사를 짓지 못해 자식들에게 식량을 대줄 수 없다고 아쉬워하신다. 이제라도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라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가늠해 본다. 

여순사건 당시 피해를 당한 유족들은 해마다 10월이면 누명을 쓴 채 버려진 죽음들, 그 억울한 죽음들과 상처를 망각의 어둠 속에서 불러내어 진혼하는 위령제를 열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한 구석을 피로 얼룩지게 했던 여순사건은 66년이 흘렀지만 여순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은 아직도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억압되고 묻혀온 것들을 어떻게 드러내느냐에 따라 한 역사적 사건의 현재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안삼순 할아버지는 여순사건으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피해보상을 위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고 서울중앙지방법원 1심에서 승소했다.

기획취재2팀 / 정리 김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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