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준 
순천전자고 교사
소설가
이 땅에서 나이든 기성세대로 사는 게 부끄럽다. 봄꽃처럼 환하고 맑은 어린 영혼들을 저렇게 보내는 죄인일 뿐이다. 시쳇말로 쪽 팔려서 낯 들 수 없다. 세상 어디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진도 앞바다의 비극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애도의 글이건, 무능 대처를 탓하는 글이건, 어떤 글이라도 써 달라는 부탁에, 이런 글을 쓰고자 하는 나이든 어른(필진)이 없었다. 참담한 심중 탓이리라. 

교사로서, 지금 이 순간, 철학자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가 던진 물음을 떠올린다. 망망대해, 난파된 배의 작은 파편 조각은 다행히 구조가 된다는 전제 하에 한 사람만 지탱할 수 있는 부력의 크기인데 두 사람이 부여잡고 있는 상황에 처한 ‘나’를 상정하여 답하라고, ‘나’에게 질문한다. 그 상황, 그 경우에 처하지 않은 어떤 결론도 정답일 순 없겠으나, 그럼에도 타인을 위해 ‘나’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 물음을 통해 우리는 배웠다. 행여, 그런 상황에 직면하여 자신의 생존을 앞세우는 행위를 한다 해도 스피노자의 질문은 삶의 여정 위에서 맞닥뜨리는 신랄한 정신이다. 그리하여, 스피노자의 질문은 위험에 처한 ‘너’를 위하여 ‘내’가 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물음으로 늘, 또 다시 ‘나’에게 다가온다. 교육은 이 질문에, 그렇게 답해 왔다.

기울어진 배에서 먼저 탈출한 진도 앞바다의 세월호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을 보면서, 이 질문의 정수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지경에 닿고 말았다. 나이든 사람으로 아이들 앞에 서기가 차마 부끄럽다. ‘나’만 살겠다고 한 세월호 선원들의 전언으로 이 땅에서 이 질문은 더 이상, 가르침이 아니다. 

교단에 선 교사고 항해를 책임지는 여객선 선원이고 아이들 앞에서만큼은 교사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어른들 어느 누구도 마침내, 거짓을 행해서는 아니 된다고 세상의 모든 의로운 교과서는 가르치고 있다. 이 땅의 나이든 어른들은 지금, 자책한다. 아이들 앞에 낯 들 수 없다. 참담할 따름이다. 
그저, 이 말 한 마디 토혈한다.  

‘졸더라도 어여쁜 너희들, 교실로 돌아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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