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준철
순천효산고 교사, 시인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꼴로 교단일기를 쓴다. 내가 애용하는 인터넷 카페에 직접 들어가 타자치는 속도로 쓸 때도 있다. 정제된 언어로 글을 쓰는 일이 힘들기도 하거니와, 나를 돌아보거나 누군가와의 소통을 위한 글이라면 굳이 완결성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서다. 다음은 며칠 전에 올린 글의 일부다.  

점심을 먹고 똥냄새(며칠 전에 화단에 거름을 뿌려서^^) 향그러운 교정에서 스마트 폰으로 글을 씁니다. 오늘 4교시에 있던 일입니다 교실에 들어가 여느 때처럼 자석 단어를 칠판에 붙이고 있는데 "아 짜증나!"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남학생이었는데 그냥 지나쳤습니다. 단어를 다 붙이고 출석을 부르는데 화가 잔뜩 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 물었더니 이런 말이 돌아왔습니다. 

"저 살고 싶지 않아요!"  

표정도 정말 살고 싶지 않은 표정이어서 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냐고 물었더니 늘 그랬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떡해. 네가 힘들 텐데." 하고 혼잣말처럼 말하고 계속 출석을 부르는데 아이의 차례가 되자 짧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5초쯤 지난 뒤에 느닷없는 괴성이 들리더니 아이는 얼굴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아주 큰 소리를 아니었고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상황은 심각해보였습니다.  

저는 공부할 기분이 들 때까지 바람을 쐬고 오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나가고 난 뒤에 반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학교에서는 별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십 분쯤 지난 뒤에 아이가 교실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더니 차분히 공책 정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수업을 재밌게 하다가 종이 울리자 교실을 나왔습니다. 이상입니다.

제가 이런 싱겁디싱거운 일은 이야기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 아이에게 잠깐이라도 자유를 주고 싶었습니다. 저를 이해하는 한 사람의 이웃이 있다는 것도 묵시적으로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살고 싶지 않은 건지 잘 모르지만 그런 짧은 자유와 이해만으로도 성장의 강을 잘 건널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위기가 기회란 말이 있습니다. 오늘 아이에게도 저에게도 위기가 왔고, 그 위기는 우리의 우정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이의 상처가 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올린 바로 그날 나는 우울한 소식을 접했다. 최근에 교사의 체벌로 학생이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끝내는 유명을 달리한 가슴 아픈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같은 학교에서 또 다른 체벌이 있었다는 사실이 학부모들의 진정으로 드러난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착잡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머리에 떠오르는 두 단어가 있었다. 자유와 이해.   

학교는 교육을 담당하는 곳이다. 그런데 내 생각엔 이 교육이란 것이 문제다. 학교는 교육이란 이름으로 학생들의 자유를 너무도 쉽게 유린한다. 폭력에 가까운 체벌도 교육이란 이름으로 버젓이 행해진다. 사회 전반의 인권감수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들도 기득권의 반발로 무산되기 일쑤다. 물론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내가 수업시간에 괴성을 지른 아이를 교육이란 이름으로 체벌을 가하거나 저주를 퍼부었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일 공산이 크지 않을까 싶다. 수업시간에 괴성을 지른 아이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교사의 권위에 도전한 것에 대해 응징하려 드는 행위를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는 후진사회요 폭력사회다. 그럼에도 학교에서 체벌을 금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자 교육이 죽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이가 적지 않으니, 이 무지몽매함을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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