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순사건 유족회 최정수씨

▲ 여순사건 유가족 최정수씨
죽도봉 현충탑 앞에서 만난 여순사건 유족회 최정수 씨는 “지난 일인데, 지금 갈등할 필요가 뭐 있어? 죽은 사람은 이미 갔으니, 역사로 기억하고 국민이 화합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여순 사건으로 부모를 잃고 살아온 그의 세월을 들어보자.

그가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아버지 최행순 씨는 좌익활동을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낙안에서도 아주 골짜기 마을에 사셨는데, 당시 토벌작전에 마을 젊은 청년들이 시달리니 큰형님하고 순천에 나오다가 경찰서에 잡혀서 끝내 못 나왔다고 한다. 당시 상사지소에 잡혔는데, 경찰이 몽둥이로 때리며 다그치니까 놀래서 말한 것이 반란군으로 찍히게 됐다. 그의 죄는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에게 밥을 해준 것이었다. 드러난 좌익 활동이 없으니 상당히 오래 경찰에 잡혀 있다가 다시 광주교도소로 넘겨져서 사형을 당해 시신도 찾지 못했다.

어머니는 돈만 가져다주었으면 나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했었다. 제일 원한이 된 것이 광주교도소에 안 넘기고 그대로 있었다면 시신이라도 수습했을 텐데 시신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은 혼백장이라는 무덤을 만들고 잔을 붓지만 그 한을 대신할 수 없다. 최 씨는 “그것이 엄청 가슴 아프다. 어찌 생각하면 국가도 원망스럽고, 시체라도 되돌려 보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개죽음으로 만들었다”며 한스럽게 말했다. 그런 한을 간직한 그가 죽도봉 현충탑에서 헌화하며 말했다. “그런 것은 하나의 역사로 삼아야지요. 지금 찌그락 짜그락 싸워봐야 뭐 할 거요? 그것은 지나간 것으로 생각하고 국민이 하나로 뭉쳐 남북통일이 돼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남의 집 머슴을 살고, 막노동을 하면서 쉴 새 없이 일해 지금은 낙안에서 오이농사로 손가락 안에 꼽는 부자가 되어 살고 있는 그는 “하도 없이 살다보니 작은 성취에도 기쁨을 누리며 살았다”며 부모 형제 없는 자기에게 시집 온 아내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고 말한다. “인생이라는 것이 고통과 괴로움이 누구나 있게 마련”이라는 그에게 가장 아픈 기억은 어떤 것일까? 여수, 순천을 다니면서 여순사건 유족회를 만든다고 분주히 다닐 때 장인어른이 “느그 아부지 나쁜 짓 했구나”라는 말을 했을 때 최정수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가슴에 멍이 들어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질 않는다. 아픈 역사 속에 세상을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그는 장인어른께 항의를 하면 자기 가정이 깨질 것 같아서 한마디도 못하고 돌아섰다. “말대답을 하면 내 가정이 무너징께 딱 접어 분거제.” 하지만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족에게서 들은 그 말이 한이 된다고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사람들의 그런 말과 편견이 얼마나 상처가 됐던지 그는 몇 번이나 “여러분들이 이렇게 위령제도 지내주고, 우리말을 들어준께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며 인사를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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