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시대를 이적금수의 시대라고도 한다. 이적(夷狄)은 오랑캐란 뜻이요, 금수(禽獸)는 짐승이란 뜻이다. 도덕적 가치는 자꾸만 퇴색되고 성폭력이니, 금품수수니, 국정원 선거개입이니, 경기침체니, 전쟁 위기니 하면서 부정적 사건이 언론을 도배질한다. 매일같이 귀와 눈이 더럽혀진다. 뉴스를 보는 것이 두렵다.

국가규모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에 들어섰건만, 사람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왜일까? 개발 독재 이후의 성장 동력은 이미 한계에 봉착하였고, IMF를 치유하는 과정과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의 파고를 넘는 과정에서 선택했던 대외개방정책의 필연적 산물이리라. 이 결과 서민 경제의 토대가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고 단기간에 해결될 전망도 없다. 양극이 점차 벌어지고 있다.

양극화의 실체는 부자가 더 잘살고 빈자가 더욱 못사는 소득 수준의 격차와 나아가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의 격차에서도 드러난다. 각종 비리, 폭력, 사기행각이 횡행하면서 무엇이 정상이고 어느 것이 비정상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 우리사회의 풍속도이다. 그러나 더욱 우려되는 것은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져 대립하는 사회적 분열과 지성의 양극화이다. 생각건대, 보수란 가치 있는 것을 지킨다는 뜻이며, 진보는 역사발전을 추동하여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적 면에서 보면 보수와 진보는 대립적 개념이 아니다.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마치 이질적인 남녀 간의 관계에 사랑이 있고 생명이 있고 조화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그런데 왜 다투고 있는가? 탐욕과 가치 인식에 대한 편차가 한 번 빠지면 나올 수 없다는 약수(弱水)의 강이 되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사회적으로 구조 ‧ 고착화되고 집단무의식화 되어 우리의 뇌리와 심장에 틀어박혀 있다. 이것이 지역감정으로, 반공으로 포장되었다. 근래에는 종북이니, 인권이니, 다문화니, 세계화니, 성장이니, 복지니 하며 그 포장이 더 다양하고 세련되었다. 언뜻 인권, 다문화, 복지라 하면 진보적 세계관과 부합되는 것 같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입하면, 그 이면에는 허구와 위선의 양면성이 있다. 물론 우리의 내면도 예외는 아니다.

수출 및 대기업 위주의 정책은 필연적으로 값싼 외국인 노동자를 불렀고, 여기서 파생되는 여러 문제를 다문화라는 수사로 포장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다문화’가 문제가 아니라 ‘다문화 정책’이 문제다. 복지? - 물론 지당하고 절실히 필요하다. 허나 현행의 복지정책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양극화의 부산물을 처리하는 임시 변통적 성격이 보다 그 실체에 접근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학교폭력? -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는가? 아이들은 보고 듣는 그대로를 체득한다. 사회풍조를 정화하는 것이 우선적이다. 지하경제 양성화? - 그냥 법대로 처리하면 된다. 지하경제가 죽을지는 몰라도 서민경제가 살아난다. 우리 사회에서 가진 자의 인권과 타락할 자유는 무한대에 가깝다. 반면, 먹고 살기 힘든 자에게 자유니 평등이니 인권이니 하는 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사치스럽기조차 여겨진다. 똑바르지 못한 말일수록 더 교묘하고 숨겨지는 것이 많다. 본(本)과 말(末)이 전도되어 말은 항상 그럴싸하게 미화된다. 껍데기는 가라. 정론직필은 단순명쾌하다.

우리 사회는 중도를 요청하고 있다. 중도는 중간개념이나 타협이 아니다. 중도는 사회적 정의를 세우는 과정이며 결과이다.

자연은 ‘밤과 낮’ 같은 양극의 순환과 변화를 통해서 생명활동을 해가지만 인간은 양극을 하나로 가져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완성을 꾀한다. 소통은 이 가운데에 있다.

 
신근홍 순천복성고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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