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시간, 홈베이스 의자에서 자고 있는 학생을 깨웠더니 짜증을 내면서 쓰레기통을 발로 찼다. 쓰레기통은 저만치 나가떨어졌고, 쏟아져 나온 쓰레기가 바닥에 흩어졌다. 달아나는 녀석의 뒤통수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다보니 부족한 사람이 학생을 가르친다는 일이 얼마나 사람을 성장시키는 일인지 절실히 깨닫고 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의미를 실감하고 있다.

공교육 현장은 날마다 격전지이자 전쟁터라는 생각이 든다. ‘스승이 없다’는 사회적 비난 속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이제 기원 전의 말이 되고 말았다. 지금 학생들은 지나칠 정도로 발랄하고 맹랑하다.

도망치는 녀석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선생님들께 반항했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소소한 불만이었다. 한 반이 60명이 넘었는데, 4월이 다 가도록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 부를 때마다 헷갈려 하셨던 선생님의 무심함과 몇몇 학생의 잘못에 대해 매번 전체 기합을 주시던 선생님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다.

내가 막상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니 20명 남짓한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한 달 넘게 걸린다. 그런데 간혹 이름이 헷갈려서 잘못 부르면 정색하고 실망스러워 하는 학생들의 얼굴에서 학창시절 내 모습을 보게 된다. 가르치는 과목 선생님의 성함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학생들일수록 잘못 불리워진 자신의 이름에 대한 항의가 더욱 거세다.

“선생님은 너희들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강조하듯 몇 번이나 화해를 신청하고 이야기를 해 봐도 소통은 막히고 학생들의 반항은 제각각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장전 중이거나 전투 중이다.

그나마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성실한 학생들이 있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학생들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선생님이 함께하는 학교인데 이렇듯 하루하루가 전쟁과 화해의 연속이라니.

다음 날 쓰레기통을 발로 찼던 녀석과 복도에서 마주치자 그녀석은 내 눈을 피해 숨으려고 했다. 어제 쓰레기통을 찼던 것에 대해 선생님한테 할 말이 없냐고 물었다. 아직도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그 녀석은 “집에서도 잘 때 깨우면 내가 화를 내기 때문에 잘 깨우지 않는다”고만 하였다. 어찌 할 수 없이 “너를 잘 이해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내가 먼저 사과를 하고, 내게 할 말이 없느냐고 했더니 쓰레기통을 찬 것은 잘못했다고 하였다. 서로 갈등했던 부분을 사과로 수습하고 어렵게 화해를 할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를 사랑해 주고 성장시키며 언제든지 용서하고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훌륭한 스승들은 많았었다. 그러나 나는 매번 소소한 일로 그 분들께 반항하고 피하기만 한 제자들 중의 한 명이었다. 나를 성장시키는 제자를 통해 다시금 스승의 고충과 은혜를 뒤늦게 깨닫고 제자들만큼은 나와 똑같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쉽지 않다.

새 학기를 시작할 때 ‘수업 시간 인사말’을 학생들에게 제안하였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매일매일 나를 성장시키는 학생들에게 공부만큼이나 어려운 일은, 선생님을 든든한 조력자나 인도자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학교는 가르치고 배우는 선생님과 학생의 역할 못지않게 용서와 화해를 통해 사랑과 이해를 배우는 관계형성도 중요하다. 그것을 익히고 실천하자는 다짐의 표현이었다. 한 종류의 사랑만 떠올리는 사춘기 녀석들에게 ‘사랑’은 오글거리고 낯간지러운 말이라, 인사말에 대한 항의가 많았지만 말의 힘을 주장하며 강행하였다.

오늘도 존경하는 제자들과 사랑받는 선생님이 새로운 전투를 예감하며 학교라는 전쟁터가 아닌 사랑터에서 사랑하고 존경하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짜고 있다.

유옥순 순천이수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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