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두꺼운 나무 등걸을 비집고 이파리보다 먼저 피어나는 봄꽃은 언제나 감동으로 다가온다. 어린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은 그저 화사함을 주지만 늙은 농부의 손등처럼 투박한 오래된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은 감동을 넘어 당찬 희망으로 솟아난다. 봄꽃들이 이파리보다 먼저 피는 이유는 좀 있으면 다투어 피어날 여름 꽃들과의 경쟁을 피해 벌들을 모아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꿀이 작은 이 약한 나무들은 겨울 내내 땅속에서 광합성을 하며 이른 봄 가녀린 꽃으로 벌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여전히 바람 차고 변덕스런 요즈음의 날씨를 보며, 봄이 왔지만 여전히 어렵고 힘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생각나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리그의 페르귄트 제1모음곡 중 ‘오제의 죽음’은 겨울 광합성의 마지막 끝자락에서 이별하는 곡이다. 들숨과 날숨으로 생명이 유지되듯 ‘오제의 죽음’은 날숨의 정점이다.

‘북유럽의 쇼팽’이라 불리는 그리그(1843-1907)는 노르웨이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노르웨이는 덴마크와 스웨덴의 오랜 지배를 받았으며 1905년 비로소 독립된 나라이다. 그가 살던 당시 서양음악은 민족주의적 색채와 유니크함을 찾으러 노력하던 시기였고 그리그 역시 국민음악파로서 이에 부응하였다. 페르귄트 모음곡은 H.입센의 희곡을 극음악으로 작곡한 것이며 이중 8곡을 뽑아 모음곡으로 오케스트라 편곡하였다.

‘오제의 죽음’은 이 첫 번째 모음곡중 하나이다.

먼저 극음악의 이야기를 잠깐 소개하자면 이렇다. 과부인 어머니 오제와 가난하게 단둘이 살고 있는 페르귄트는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하며 방탕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결혼식장에서 남의 신부를 보고 첫눈에 반해 함께 도망치지만 곧 싫증이나 버리고, 산속을 헤매다 농부의 딸인 솔베이지가 구해주어 그와 결혼을 약속하지만 곧 어머니에게 돌아가 버리고 만다. 한편 페르를 기다리며 병중에 있던 어머니는 돌아온 아들을 보자 안도 속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이후에도 주인공 페르는 부와 모험을 찾아 온 세계를 여행하다 황금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해 모든 것을 잃고 고향에 돌아온다. 그리고 백발이 되어 그를 기다리는 솔베이지의 무릎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어머니의 죽음에 붙여진 장송곡 ‘오제의 죽음’은 깊은 한숨처럼 여린 현악기의 단순한 선율로 시작해 반복하며 점차 흐느낌으로 번지다 어머니의 쓰다듬는 손길로 울음을 멈추고 잔잔한 평화로 인도한다. 단 하나의 선율패턴을 쌓고 음을 옮겨가며 긴 이별과 슬픔, 세월을 느리게 연주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애수와 비통에 젖게 한다.

땅 속 기운들이 기지개를 일으키는 봄 아지랑이에 오제의 죽음, 장송곡을 연주하며 긴 겨울광합성을 마치고 새봄을 맞고 싶다.

꽃 한 송이 피우고 싶다.

이재심 지오바이올린학원 원장
철학과 음악을 전공했으며 현재는 바이올린과 오카리나를 연주하고 가르친다. 음악을 향유하고 사유하는 이 행위가 무디어진 일상에 잔잔한 즐거움이자 위로가 되기를 꿈꾸며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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