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형에게

▲ 고흥영주고등학교 교사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해도 봄은 봄이지 않겠는지요. 당신이 ‘청춘’이었던 시절에는 봄은 청춘이요, 그것도 봄꽃 흩날리는 눈부신 청춘이었을 테지요. 당신이 어떤 느낌으로 이 봄을 맞이하고 있는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가슴 뛰는 설렘으로, 청춘의 느낌으로 맞이하지 않을 거라는, 그러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강한 건 무엇 때문일는지요. 아마도 벚꽃잎 흐드러지게 흩날리는 무렵이면 봄의 끝자락을 붙잡고,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를 타령조로 읊조리며 이 봄을 보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새 학기초. 학교는 매우 분주하게 돌아갑니다. 늘상 해오던 일을 아주 잘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러한 풍경을 참 씁쓸하게 지켜보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숱하게 많은 문제를 제기해도 마이동풍(馬耳東風)하며 봄 한철 꽃샘추위를 견디듯 잘 견디고 나가는 듯 보입니다. 이제 그 자리에 목소리 높여 ‘교육’을 이야기하거나,  참된 교육적 가치를 고심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듯도 보입니다. 자신이 생각한 당대의 이상이 조금이지만 제도화의 과정을 통해 일상화된 탓일까요? 어쩌면 그것이 당신을 봄에서, 혹은 청춘에서 멀리 떨어져 나오게 한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청춘의 시절을 바쳐 감내한 사랑은 불현듯 다음과 같은 진지한 물음을 던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황지우, <뼈아픈 후회>)

오늘 이렇게 새학기에 ‘봄타령’을 하는 것은 대지의 역동을, 봄의 무궁무진한 조화를 당신에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올봄에는 유난히도 당신과 함께 진달래꽃 핀 봄의 산천을 거닐고 싶습니다. “백일홍 같이 붉게 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 국화와 같이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 모진 비바람 만나 흩어지는 가엾은 꽃을” 당신과 보고 싶어 하는 뜻은 무언의 교감(交感), 혹은 시인이 내린 답이 대신해 줄 것입니다. “오래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 봄철을 먼저 아는 것이 정말 꽃이라고”(박팔양, <너무도 슬픈 사실> -봄의 선구자 진달래를 노래함)

그리고 이 봄에, 당신에게 꼭 이 메시지 하나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청춘은 끝나지 않았다고. 당신에게 청춘은 오지도 않았으니, 감히 말하건대 시건방 떨지 말라고. “그것은 나이나 육체와 무관하고, 먹고 사는 일과도 무관하며, 저 연두의 새싹처럼 용감하고, 무모하고, 에너지가 충만한 어떤 것이며, 비로소 푸르고 아름다운 인생의 특수한 지층일 것”이라고.(박민규, <푸를 청, 봄 춘>) 그래서 우리는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 막막하고 어두운 겨울벌판에서 새벽이 어떻게 말달려 오는가를, 저 여린 봄꽃들이 모진 세월을 어떻게 살아내고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서, 온 산천에 혁명의 꽃사태, 꽃세상을 이루고 있는지를.

새학기 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에게 우리는 봄의 새 세상을, 봄의 역동을 느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해야 합니다. 답답하고 막막하게 하는 우리 교육의 현실은 저 봄 탓이 아니라고. 우리들을 옥죄는 고달픈 삶의 질곡도 언젠가 봄눈처럼 녹아내릴 것이라고. 그래서 눈이 부시게 저기 화사한 꽃사태와 연둣빛의 향연을 이룰 것이라고.

이 봄, 아직도 오지 않은 우리의 청춘을 위하여, 그리고 교육의 혁명을 위하여, 부디 아름다운 건투(健鬪)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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