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생화화가 모정 이윤숙
순한 겨울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있는데 갑자기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온다. 몸은 추운데 마음은 봄볕을 느낀다. 하지만 아직은 춥다. 허허로운 겨울빛과 봄빛이 함께 한 날, 겨우내 야생초와의 상사병으로 봄을 손꼽아 기다리는 모정 이윤숙(한국화, 문인화가) 화가를 만났다. 화가의 작업실에는 이미 기다림과 설레임으로 따뜻한 기운이 가득 넘치고 있었다.

아주 어릴적 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보인 이윤숙(58)의 꿈은 화가였다.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지만 대회에 나가면 늘 상을 받았다. 고1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네 꿈을 이루게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셨다 한다. 젊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생활전선에 뛰어들고 결혼으로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로 살면서 모든 것은 평범해졌다. 그러나 가슴 한켠은 늘 뭉쳐 있어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마음은 병이 들었다.

“남들이 5분 갈 거리를 30분 걸려 온갖 시름을 양어깨에 매고 매일 같이 봉화산을 올랐어요. 그러던 어느 날 몸과 마음을 풀어놓고 바위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극적으로 꽃한송이를 보게 되었죠. 운명 같았어요.” 그 이끌림이 꽃을 보게 했고 화가는 단번에 꽃과 사랑에 빠졌다.

이리 이쁜게 어찌 여기 피었냐
첫눈에 사랑에 빠진 그 꽃한송이는 잔대(딱주)였다. 그것도 3년 후에야 이름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너무 많이 보아 너덜너덜해진 식물도감을 펼쳐 보이며 보라색의 작은 꽃을 찾았다. 그때의 감흥이 다시 살아올라오듯 얼굴이 반가움으로 환해졌다.

“이렇게 이쁜데 어떻게 여기서 피었냐! 이렇게 이쁜데 이제까지 눈에 안띄고 이제 띄였냐! 이렇게 이쁜데!” 제대로 만날 사람을 만난 듯 그날 그렇게 꽃과 말을 했다. 그 후론 꽃을 보러가는 설레임으로 걸음도 빨라지고 행동도 빨라졌다. 사랑은 설레임으로 왔다.

마음의 병이 들었을 때도 미쳐 보였겠지만 꽃과의 사랑에 빠진 후로는 단단히 미쳐 살았다. 남편이 퇴근해 집에 돌아와 부인이 없으면 봉화산으로 찾으러 올 정도였다. 꽃에 대한 관심을 가지니 재미도 있고 공부도 하게 되고 그러면서 매일같이 연필과 노트를 들고 산에 올랐다.

“잔대는 나의 첫사랑이에요. 스스로 일어난 사람은 스스로 갈 방향을 아는 것 같아요. ‘내가 사는 사명처럼 너로 인해 희망의 빛을 찾았으니 내가 너를 알려야겠다’ 는 마음으로 뭔가를 하게 되었죠.” 그런 움직임이 꽃사모(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인연으로 꽃에 대한 지식과 사랑도 더 쌓게 되었고 꽃을 만나기 위해, 꽃을 찾아 전국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철원, 마라도, 을릉도... 꽃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게 되었다.

꽃은 자기 할 일을 안다
야생에서 피는 꽃을 야생화라고 하는데 나무에서 피는 꽃도 야생화다. 그러나 야생초는 풀에서 피는 작은 꽃들이다. 태어남, 탄생의 기쁨을 온전한 기쁨으로 잠깐 동안 꽃을 피우기 위해 땅에 의지해 긴 겨울을 견디는 그 작은 꽃들에 화가는 마음이 더 간다. 야생초의 엄마는 땅이다. 노자에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道)는 자연을 본받는다.” 는 말처럼 모든 것은 자연이 키워준 것이다. 화실에 오는 사람들에게도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자기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도록 스스로 마음 가는 방향의 자연스러운 교육을 하고 있다. 야생초에게는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꽃들은 경쟁하지 않고 자기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죠. 자기 할 일과 안해야 할 일을 분간할 줄 알죠. 다투지 않고 배려하면서 태어나요 협동하며 살고. 그래서 개불알꽃은 배려예요. 너그들 따뜻할 때 피어라. 나는 가을에 피어서 겨울동안 이파리는 땅에 의지해 살테니”

▲ 야생화 이름을 알기 위해 월부로 산 야생화사진집은 얼마나 자주 들여다봤는지 너덜너덜 해진 상태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미술에 대한 꿈을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마흔 한 살이라는 나이에 다시 그림공부를 시작하여 가정과 학교를 성실히 오가며 꼬박 10년을 무릎제자처럼 봉사하며 살았다. “엄청 애교도 많아요 내가. 발 딱아 주라면 발도 딱아주고. 그런게 있어야지 나한테 오는 게 있지 절대 일방적인 것은 없어요. 나쁜놈이지 나쁜년이지. 지 잘났다고 그러면.”

너무나 하고 싶어 한 공부라 재미있게 했다. 아이들은 어느 정도 독립적이고 마음은 자유로우니 나이 들어 공부한 게 힘은 많이 들어도 행복했다. 작업에만 온전히 신경 쓸 수 있는 희망의 끈을 잡고 열심히 그림만 그렸다.

사랑도 예술도 진행형
2003년 마흔일곱에 순천 예술회관에서 첫 전시회를 열어 최초로 야생초를 알렸다. 그 후로도 야생화만을 고집하며 꾸준히 작업하고 있다. 작가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닌 예술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팔기 위한 작품을 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작품을 남기기 위한 예술가의 길을 오롯히 가며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늘 다양한 시도로 변화하고 있다. 사랑도 예술도 진행형이다.

“내가 그리고 싶은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니 항상 기분이 좋고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해요. 사회에 적극적이지는 못하지만 아픈 사람과 같이 어울려 질 수 있는 마음으로 살면 되요.”

야생화 작가로 불리는 것을 뿌듯해하는 화가는 야생화를 통해 고개 숙여 앉아 낮은 자세로 봐야 겸손함과 경쟁으로 남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아닌 손잡고 가면서 같이 피고 아름답게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을 배웠으면 한다. 어둡고 컴컴한 땅속을 기어 들어가 결국엔 꽃을 피우는 풀뿌리 민주주의, 꽃피는 민주사회를 만들기 위한 힘이 바로 땅에 볼품없이 엎드려 있는 작은 꽃 야생화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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