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 41호 순천만 이야기-두번째

아주 오래전 순천을 지키는 두 신(神)이 있었으니 하나는 용신(龍神)이요, 하나는 호신(虎神)이었다. 이 두 신은 ‘산천이 아름다고 기이하여’ 소강남이라 불리며, ‘백성들의 물산이 부유하고 풍성한’ 순천을 항시 노리던 외적 특히 섬나라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순천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였던 남쪽 포구 근처의 기다란 산이 되었으니 순천을 지키는 용호문(龍虎門)인 것이다. 그 중 왼쪽 산이 용산(龍山)이며 오른쪽 산이 호산(虎山)이요, 두 산 사이의 바다 통로가 용두포(龍頭浦)이다.

▲ 사진-김학수 시민기자
조선 성종 12년(1481년)에 편찬된 후 중종 25년(1530년)에 증보되어 나온 조선시대의 유명한 인문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50권의 순천도호부 편과 순천 출신으로 조선 후기 숙종 42년(1716년)에 태어나 정조 8년(1784년)에 나이 69세에 순천 지방의 인물․기사(奇事)․풍속․지리 등을 악부 형식을 빌려 읊어 정리한 조현범이라는 유생이 쓴 『강남악부』에 실린 순천에 대한 이야기를, 현재 지역에 전하는 전설과 엮어서 표현해 보았다. 여기서 용산은 현재 순천만 전망대가 있는 바로 그 용산이며, 호산은 용산의 맞은편에 있는 별량면 장산(일명 호산)이고, 용두포는 지금은 순천만이라는 이름 속에 포함되어 있는, 용산 아래쪽 포구를 말한다.

실제로 『순천시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대한 왜구의 침략이 고려 고종 때부터 고려 말까지 총 490회 정도 있었는데 그 중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상도에 약 140여 차례, 경기와 충청권에 약 120회, 그리고 호남 지역에 약 50여 차례 등 많은 침략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전라남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침략을 받은 곳은 단연 순천 지역으로 당시에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만든 유명한 성이 바로 흙으로 쌓은 낙안읍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순천만 주변에는 흔히 우리 민족이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인식하였던 용들의 이야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

순천만의 가장 서쪽에 있는, 보성군 벌교와 순천이 만나는 별량면 구룡리에는 구룡 마을과 용두 마을 등 두 개의 마을이 있다.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희롱하는 형국이라서 구룡(九龍)이라고 했다는 구룡 마을의 이야기는 너무 과장되게 포장된 것 같아 그만두더라도, 용두마을에는 우리 민족의 비극과 함께 하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한다.

우리 조상들은 보통 기다란 능선을 가진 산을 그 모양과 풍수설에 따라 용(龍)으로 표현하곤 하였다. 용두마을에도 바닷가를 향해 달리는 듯한 기다란 산 능선이 있고 그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에 마을이 크게 형성되어 용머리(용두)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마을 어르신들의 말씀에 의하면 1920년대에 일제가 경전선 철도를 놓으면서 굳이 마을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용의 머리 바로 아래(만약에 용이 목이 있다면 바로 목 부분)쪽으로 철로가 지나도록 만들어 현재는 마치 용의 머리가 몸통에서 떨어져 덩그러니 놓여 있는 그런 형국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마을에는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작은 산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우리 국토의 지맥을 끊기 위해 우리 산천 곳곳에 쇠말뚝을 무자비하게 박았던 교활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고려하면 마을 어르신들의 주장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실제로 경전선 철로의 행로를 보면 용두 마을에서 아주 심하게 휘어짐을 볼 수 있다. 그냥 곧게 철로를 놓으면 용의 꼬리나 자를 것 같아 일부러 용의 머리를 자르기 위해 철로의 방향을 억지로 돌려놓았다고 충분히 의심을 할만하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가 힘이 없어 일본의 모든 행패를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 일어난 일인데…….

그 용두 마을의 가장 남쪽에는,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모양이 영락없이 황새가 순천만을 향해 날아가는 듯한 형상의 산등성이가 덩그러니 있는데, 그 이름이 ‘황새등’이다. 위성 사진도 없던 시절에 어쩌면 그 형상을 정확하게 황새로 보았는지 조상들의 눈썰미에 새삼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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