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자·의·삶·의·현·장 -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김광호

입춘이 지났다. 어디선가 기타음 한 줄기만 흘러들어도 꽃망울이 터질지 모른다. 분명코 봄은 올 것이고, 봄이 오면 겨울 내내 찢기도 얼어 터졌던 상처도 아물 것이다. 김광호 씨는 그 자연의 이치를 안다. 살점이 찢겨나가는 혹독한 겨울을 겪어본 사람이기에 너무도 잘 안다.

순천 조례호수공원에 홀연히 나타나 매주 일요일이면 혼자 음악을 들려주고 노래 부르던 사람이 있었다. ‘광호 이야기’라는 작은 현수막 하나 걸고 관객이 있든 없든, 그저 음악이 좋아 길거리로 나선 사람 김광호 씨(44세). ‘젊은 남자가 무슨 한이 저리도 깊어 온 몸으로 노래를 하나’ 싶었을 것이다.

 
김광호 씨는 광주 사람이었다.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고, 광주에서 결혼하고 살다가 야심찬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빚더미에 앉게 되고 망신창이가 되면서 이혼까지 겪어야했다. 추락할 대로 추락해버린 인생을 끌어안고 누나가 있는 순천으로 오게 된다.

“완전 밑바닥 인생이 되었다는 마음이 나를 힘들게 하더라구요. 그러다가 매형이 생일선물로 기타를 사주셨어요. 노래하는 거 좋아하니까 기타 치면서 마음이나 위로 하라고.”

좌절감에 빠져있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움켜잡았던 기타가 결국 김광호 씨를 일어서게 했다. 매일 기타를 연습하다가 돌연 길거리로 나서게 된다. 자신과의 길거리 정기공연을 약속하고 매주 조례호수공원에 나가 사람들과 소통을 했다. 그렇게 김광호 씨는 세상에 다시 나섰다.

“내 이야기가 한 신문에 나간 후 방송국에서도 왔었어요. 그러면서 학교에서도 지도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구요.”

2010년 순천의 한 지역신문에 기사화되면서 김경호 씨의 삶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방송매체를 통해 알려지면서 교단에까지 서게 된 것이다.

“방과후 밴드부 지도를 하면서 ‘선생님’이란 호칭이 붙었어요. ‘선생님’이라 불리게 되니까 마음가짐이 달라지더라구요.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끼게 됐어요.”

김광호 씨는 여러 곳에서 선생님이다. 학교 방과후를 비롯한 동아리지도, 피아노학원 아이들, 일반인 밴드교육 등 순천, 구례, 고흥까지 달려 다닌다. 지금이야 달려 다니지만 타지역까지 버스를 타고 뚜벅이 걸음마로 다닌지 오래였다. 그를 항상 따라다녔던 빚더미와 신용불량자 딱지를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기타 하나 둘러메고 버스로 이 지역 저 지역 전전긍긍하던 그를 지인이 보다못해 중고차 한 대 넘겨줘서 지금은 날개를 달았다고 말한다.

이제 ‘김광호 선생님’이 귀에 더 익숙하게 들리는 사람. 그에게 음악은 늘 함께 있었다. 노래를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최초로 음악 동아리를 창단하여 명성을 알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고1부터 고3까지 광주 충장로에 있는 카페에서 알바로 노래를 부르며 살았던 ‘언더그라운드 가수’이다.

“가수가 더 좋으세요? 선생님이 더 좋으세요?”

“(주저없이) 선생님요! 나는 가수가 아니에요. 우리나라에서 가수라는 개념은 음반을 내야만 가수에요. 요즘은 협회만 등록해도 가수라 불러요. 나는 그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가수는 아니죠. 공연할 때도 ‘가수 김광호 입니다’라고 안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김광호 입니다!’라고 소개해요.”

촛불가수 김광호
스스로를 가수라 부르지 않는 김광호 씨에게 최근 별명이 하나 붙었다. 우연한 요청에 길거리 집회현장에 나서면서 수많은 촛불이 그의 노래를 함께 부르며 ‘촛불가수’를 외치게 되었다.

“집회현장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물론 돈도 안 되는….”

“돈을 쫒아가지는 않아요. 그럼 노래하기 힘들겠죠. 나를 부르는 곳은 어디라도 간다는 마음으로 가요. 촛불집회 가면 때로는 옛날처럼 민중가요를 부르고 싶은데 오히려 주최 측에서 민중가요를 못 부르게 해요. 민중가요도 좋지만 흥을 돋을 수 있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하더라구요(웃음).”

▲ 촛불집회 현장에서 만나다. 순천 촛불집회 무대에 오르면서‘촛불가수’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로인해 수많은 촛불이 흥겹다.
기타를 치는 김광호 씨에게 손가락은 더없이 소중하다. 그런데 그의 손가락 약지 한 마디가 펴지지 않는다. 기타 줄을 눌러서 소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줄을 잡아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한 손가락을 포기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소리를 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연습하고, 그러다가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안 되는 건 없다고.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밴드는 개인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어요. 혼자서 하는 음악이 아니니까요. 밴드는 같이해야 해요. 잘 하는 사람은 못 하는 사람을 받쳐줘야 돼요. 그래야 뒤쳐지는 사람도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화음이 만들어 지는 것이죠. 각기 다른 악기들의 불협화음을 하나의 소리로 만들어 가는 것이 밴드니까요.”

▲ 드럼연주를 가르치고 있는 김광호 씨. 노래하는 것보다, 직접 연주하는 것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더 행복하다.
김광호 씨는 칭찬에 인색하다. 공연의 잘잘못을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들에게 한마디 묻는다. “즐겼느냐?”라고. 스스로 무대 위에서 즐겼으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연하는 사람이 즐기면 관객도 함께 즐기게 되는 것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강조한다.

선생님 김광호 씨는 아이들의 능력을 믿는다. 동기부여만 해주면 짧은 시간에도 아이들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음을 안다. 그런 아이들에게 굳이 길게, 멀게, 오래도록 지도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길게 봐야할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직 보지 못한 아이들의 잠재력을 끌어 올리는 것일 테니까.

그가 아이들에게 더욱 마음이 쏠리는 것은 이혼하면서 헤어진 딸이 눈에 아롱거리기 때문이다. 딸을 가르친다는 마음으로, 딸에 대한 그리움이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녹아난다. 언젠가 딸이 찾아왔을 때 열심히 살고 있는 당당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날까지 김광호 씨의 그리움은 노래로, 음악으로 딸의 마음을 찾을 것이다.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