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라/이/브/러/리-웃장에서 25년째 장사하는 김영자 아주머니

4년 전 여수에서 순천으로 이사를 와 중앙도서관을 가기 위해 의료원로터리에 있는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갖가지 튀김과 어묵을 만들어 파는 아주머니께 도서관이 어딘지 물었다. 그 때 아주머니는 ‘저 사람은 얼마나 팔자가 좋으면 도서관을 갈까’생각했단다. 그러면서 당신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동네 언니들과 겨우내 김발을 짜서 팔았던 이야기를 해주셨다.

영하의 추운 날씨에 포장마차 안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손님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면서도 능숙하게 연신 튀김을 튀겨내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는 아주머니는 25년째 같은 자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 포장마차에는 어묵, 떡볶이, 고구마튀김, 오징어 튀김, 김말이, 야채튀김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추운 날 서민들의 배고픔과 추위를 달래주며 휴식처가 되기도 한다.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어머니, 오랜만이에요.” 반갑게 웃으며 들어선다. 누구인지 물으니 평소 친하게 지내는 학생인데, 가끔 와서 물도 길어다 주고 일을 도와준단다.

1948년에 일어난 여순사건으로 인해 유복녀로 태어난 김영자 아주머니(64세)는 자기 사업인 포장마차를 운영하면서부터 밤 12시 이전에는 하루도 자본 적이 없다며 힘겹게 살아온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 놓으셨다.
 
여순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아버지 
 “광양에서 경찰관으로 근무 했던 아버지는 여순사건이 일어났을 때 목숨을 잃었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그랬던지 내가 태어나자마자 엄마 젖이 말라 버렸나봐. 엄마 젖을 한 방울도 못 먹고 자랐지. 그 당시 미국에서 건너 온 우유가루 배급을 탔는데 그 우유만 먹으면 토해서 먹일 수가 없었대. 그래서 외할머니가 쌀을 씹어서 화롯불에 끓여 죽을 만들어 먹이며 키우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지.”

6.25 동란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났으니 아주머니가 처음 만난 세상은 그야말로 뒤숭숭하던 시절이었다. 민족의 비극으로 인하여 한 개인의 삶은 위태롭기만 했다.

“낮에는 우리나라 군인이 와서 반란군한테 먹을 걸 줬다고 족치고, 밤에는 반란군이 내려와서 괴롭혔어. 하루는 반란군이 집으로 들어왔는데 어른들이 나를 자리위에 앉히면서 꼼짝 말고 앉아 있으라는 거야. 자리 밑에 양식을 숨겨 놓았거든.”

가슴에는 항상 그늘이
“내가 5살 때 엄마가 재혼을 하셨어. 새아버지가 오면 보기 싫어서 구석에 가서 울어. 어렸을 때 아빠 찾아 울고, 엄마 보고 싶어 울고 눈물도 한도가 있는가봐. 지금은 울지를 않는 걸 보면. 나한테 없는 것은 항상 한이 되고 원이 되는 거야.”

어머니마저 재혼을 하셔서 누구한테 속엣말도 못하며 자랐다. 어머니가 명절 때나 집안 행사 때 외갓집에 오면 어머니 옆에 누워 행여 언제 말 걸어주려나 기다리는데 어머니는 속도 모른 채 잠만 쿨쿨 주무셨다. “그때 그 외로움이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며 눈시울을 붉힌다. 그래서 부모 없는 아이들이 가게에 오면 금방 알아채게 되고, 더 잘해주게 된다고 한다.

어느 날은 혼자 밭에서 김을 매다가 기도를 하였다. ‘이 세상에서 돈도 뭣도 다 놔두고, 나 하나만 아껴주는 사람이 있으면 시집을 가야지’하는 기도를 늘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22살에 갑자기 중매가 들어왔는데, 순천 용수동에 사는 총각이었다, 예전에 보살할머니한테 들은 말이 생각났다.

“북쪽에서 사람이 오겠네. 마음 탁 놓고 믿고 시집가소” 하는 말이 잊혀 지지 않아 그 총각과 결혼을 했다.

시집을 가서 보니 시할머니, 시어머니, 시누이 넷에 시아버지는 일본 징용에 끌려가 일을 많이 하고 오셔서 해소 병이 깊으셨다. 시집 간 사흘째 되는 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시아버지 병수발하며 산에 풀 뜯으러 다니고, 물도 길어다 날랐다. 비닐하우스에 밤늦도록까지 상추농사를 짓고 또 아침에 보리방아를 찧으면 코피가 쏟아졌다.

아주머니 삶에는 일이 맨날 따라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뭐 할라고 일을 그렇게 많이 했는지 몰라. 지금 생각해 보니 친척 어른들한테 미움 안 받을라고, 눈치 안 받을라고 있는 힘껏 일을 했지 싶어.”

자식들 가르치기 위해
아이들이 순천 시내로 나와 학교 다닐 때 농사짓는 걸로는 학비를 감당하기가 힘들어 중앙동에서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다가 리어카를 구입하여 호두빵, 땅콩빵을 구워 팔았다. 밑천 없이 돈을 버는 일은 노점상밖에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라 한창 노점상에 대한 단속이 심하던 때였다. 장사가 잘 되니 부근 상점에서 신고를 하여 하루가 멀다 하고 동사무소직원들이 와서 리어카를 밀어내고, 아예 빼앗아 가기도 했다. 시청으로 리어카를 찾으러 가면 그때만 해도 공무원들이 얼마나 불친절했는지 자기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한다.

“하루는 직원들이 와서 리어카를 엎어버려서 주전자, 그릇들이 다 땅에 나동그라지고, 반죽은 들통에 가득 담겨있는 걸 보니 눈물이 바가지로 흐르는 거야. 내가 여기서 무너져 버리면 애들 넷은 어떻게 공부시킬건가. 내가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누구를 죽인 것도 아닌데 이를 갈고 한 번 해보자 굳게 마음먹었더니 눈물도 안 나와.”

▲ 주로 아주머니 혼자 일하는데, 바쁠 때는 남편이 도와줘서 한결 기운이 난다.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자식들 공부시키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일 한 덕에 자식 넷을 대학 공부까지 뒷바라지했다. 다들 검소하게 생활하며 자신들이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회인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흘린 눈물이 바다가 되었을 거라는 아주머니는 이제는 마음이 편안하단다.

재작년 12월 눈길에서 넘어져 오른팔이 부러져 병원에 간 김에 건강검진을 했더니 위암초기라는 진단을 받게 된 그녀는 평생 놀아본 날이 없었는데 아파서 1년 동안 쉬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요즘은 1주일에 3, 4일만 일을 한단다.

아주머니가 한 많은 고갯길을 한 고비 두 고비 헤쳐 나갔던 것처럼 병도 의연하게 대처하시리라.

김연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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