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때 아이들을 차별하는 교사였다. 그로 인해 많은 일을 겪기도 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어둡고 불행한 시간들이었다. 물론 모든 것이 다 내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학기 초만 해도 나랑 사이가 무척 좋았던 반인데 갑자기 수업분위기가 나빠져서 반장 아이를 교무실로 데려와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 이런 아이들 아니었잖아. 아무래도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 같은데 얘기해주지 않겠니? 잘못이 있다면 내가 고치려고 그래.”

처음에는 그런 거 없다고 딱 잡아떼던 아이가 두 번 세 번 간절하게 묻자 뭔가 결심한 듯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그 애를 바라볼 때만 눈이 빛나요!”

그 애라고만 했는데도 그 애의 얼굴이 떠오른 걸 보면 내가 ‘그 애’를 편애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그 애가 얼굴이 유난히 예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적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교사인 나에게 가르치는 보람을 안겨주는 그런 아이였다. 그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솔직히 조금은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 억울함과는 상관없이 아이들과의 소통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다행히도, 그날의 충격은 나로 하여금 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성찰을 하도록 해주었다. 학교는 차별이라는 룰로 운영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우대하고 공부를 못하거나 인간적인 약점을 가진 학생들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질타가 바로 그 예다. 물론 차별은 불가피한 일일 수도 있다. 예쁘고 인성이 좋은 아이에게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차별한 내 자신을 용서한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으리라. 교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인정한 셈이었다. 하지만 내 자신을 용서하고 안 하고는 상관없이 아이들과의 사이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이 깊어지면서 다행히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교사라면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인간적인 감정들을 그대로 수렴해서는 안 되겠구나! 어쩌면 이런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역행하고 아이들을 공평하게 대해주는 것이 교사의 전문성일 수도 있겠구나!”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어떻게 하면 각양각색의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만날 수 있을까? 요즘 나는 매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의 이름으로 출석을 부른다. 그것도 그들의 눈을 3초가량 들여다보면서. 처음에는 이름이 잘 외워지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그랬던 것인데 차츰 재미가 붙었다. 내가 영어 선생이라 출석을 부를 때는 아이들이 영어문장으로 대답을 해야 한다. 영어 문장을 만들 자신이 없으면 그냥 “I love you!”하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영어를 못하는 아이들일수록 나에게 사랑의 고백을 자주 하는 식이 되었다.

대다수 아이들은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호명되는 것을 좋아하는 눈치였다. 나와 내밀한 소통을 즐기는 아이들도 생겼다. 이런 식으로 한 달 정도 지나니까 아이들 이름이 다 외워졌다. 또 한 달 쯤 지나자 아이들 하나하나 그들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가진 인간적인 조건이 아닌 생명 그 자체를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지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다가 ‘기적’이 일어났다. 아이들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이들이 좋아진 것이 기적이라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학교에는 좋아하고 싶어도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아이들이 있다. “교사가 받는 봉급의 절반은 치욕을 견딘 고통수당이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을 정도다. 그런 점에서 교육은 감정노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들의 눈 속을 들여다보는 너무도 작고 소박한 실천이 나에게 준 값진 선물인 셈이다.

안준철/순천효산고 교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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