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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 난 스물일곱이 되었다. 스물여덟 해 전, 스물일곱 어무이는 서른하나 아부지랑 결혼도 하셨댔는데, 스무 살부터 취업해 번 돈을 모아 혼수 장만도 다 자립으로 하셨댔는데, 그것도 동년배에서는 늦은 나이였댔는데. ‘에이, 그 땐 그 때고!’ 부러 뻔뻔한 척 외마디 괴성을 질러 보지만, 뒤이어 이어진 현재진행형 ‘위너’들의 소식에 벙어리 냉가슴이 되고 마는 나. 친척네 누구 딸은 공무원에 합격했다던데, 고등학교 동기 누구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기업에 취직했다던데, 동생 친구 누구는 대학 다니면서 착실하게 준비해 그 어렵다던 사법고시를 단번에 패스했다던데... 그 주워섬김 뒤에는 ‘넌 그동안 뭐 했니’라는 결과론적 질타가 숨어있다는 걸 알기에, ‘루저’인 난 그저 조용히 입 다물고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

때마침 신문에서는 청년백수가 72만 명에 달하며, 청년층 고용률도 40.4%에 그친다(2012년 12월 10일 한국은행 발표, ‘청년층 고용 현황 및 시사점’ 보고서)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다. ‘거봐, 이건 구조적인 문제야. 투쟁해야 한다니깐!’ 예전 같으면 소심한 마음에 피했을 운동권 친구의 일침에 괜스레 속 시원함을 느끼며 ‘나도 이참에 운동권 해봐?’ 하는 발끈한 마음을 품기도 해 보지만, 뒤이어 이어지는 기사에 내 속내가 들킨 듯 움찔해진다. 한국은행 보고서는 우리나라 청년층 고용률이 낮은 이유의 하나로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지적하면서, 열악한 2차 시장을 피하고 임금 등 근무조건이 좋은 1차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학력수준을 높이거나 자발적 미취업을 택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랬다. 모범생으로 정해진 길, 익숙한 길만을 주억주억 따라다닐 줄만 알았던 내게, 대학 졸업은 불안과 혼란이었다. 정해진 답처럼, 바늘구멍 같은 임용고시를 준비해 보겠다고 부모님 신세를 진지도 벌써 2년. 그렇다고 독하게 전략적으로 공부에만 전력할 수 있는 뚝심도 없었고, 불안정한 티오와 경쟁률 앞에 지레 겁먹어 바들바들 떠는 소심한 수험생이었던 난, 과열된 경쟁률의 허수를 채우는 탈락자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겐, 밑바닥 험한 일을 감당해 낼 재간도 체력도 없었다. 서른이 넘도록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결국 한 자동차공장에 취업하여 3교대 근무를 버텨내고 있다는 친척 오빠의 행보, 대학에 가지 않고 부모님의 뒤를 이어 시골 농사꾼의 삶을 선택하겠다던 덩치가 산만한 친척 동생의 선언, 매일같이 추운 바깥바람을 맞으며 쭈그려 앉아 푸성귀를 파는 할머니들 앞에서 난 부끄러워야 했다.

더 이상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지 말아야겠다, 일을 해야겠다, 돈을 벌어야겠다, 라고 다짐한 올해. 기업에 들어갈 실무를 가르쳐주는 교육기관이라는 파란직업학교에 가서 담당자와 상담 후 입학원서까지 쓰고 온 나. ‘아직, 새롭게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아니네요!’라는 담당자의 응원에 으쓱해하며. 결국 운동권 친구의 투쟁에는 멀리서 응원만 할 뿐이지만, 철도노조 파업 소식엔 페이스북 좋아요 누르기만 할 뿐이지만, ‘안녕하지 못한 세상에서, 안녕한 사람이 되어 안녕 못한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만큼은 심지처럼 가지고 있는 오늘. 지금도 눈칫밥 먹으며 취업을 준비하고 있을 ‘취준생’ 분들에게, 새해인사를 건네 본다. ‘안녕들 하십니까’.  
 
p.s. 설날이 싫군요. 떡국 한 그릇의 무게만큼, ‘너 요새 뭐하냐’는 물음의 무게만큼, 떳떳하지 못해서이겠지요. 내년에는, 내후년에는 부모님 내의라도 챙겨드릴 수 있는 효녀가 되어보고 싶군요.

박샘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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