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상에 봄이라는 계절은 몇 번이나 찾아왔을까. 빙하기 때에도 봄은 있었을까. 그리고 내가 맞이하는 봄은 이 지상에 찾아온 봄의 총합에서 얼마만큼의 분량이 될까.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의 짧음을 노래하지 않은 시인들은 아마도 단 한 명도 없을 것이지만 생의 유한함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시인은 아마도 중국 당나라 때의 이백이 아닐까 싶다.

그는 ‘춘야연도리원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무릇 이 세상이라는 것은 만물이 쉬었다 가는 여관이네. 시간이라는 것은 영원히 길 떠나는 나그네여서 부평초 같은 생은 하룻밤의 꿈만 같은 것이라네. 우리가 즐거움을 누릴 시간이 얼마나 될 것인가. 선인들이 촛불을 켜고 밤 늦게까지 놀았던 것은 참으로 이유가 있었다네.”라고 적었다. 시간은 영원한 나그네이며, 우리의 생은 그 영원한 여정 속에서 한 점에 불과할 뿐인데 날마다 즐기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올봄은 참으로 희한하게 왔다. 하기는 지난 겨울도 겨울답지 않았다. 눈 덮인 노고단에 오르려고 2년 전에 사 놓은 아이젠과 스패치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제 방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하늘은 잔뜩 토라져서 눈 한 번 후련하게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을까.

봄소식이 오기도 전에 중국 우한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도 저러다 말겠지 하며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저 먼 국경에서 국경 너머 이쪽을 흘끔거리다 사라질 줄 알았던 침입자들이 슬슬 국경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서야 우한(武漢)이라는 중국의 도시를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지도로 위치를 확인했다. 나도 뭔가 방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렇게 하게 한 것이었다.

나는 그때 6개월 계약으로 다니던 기간제교사도 끝나 밖에 나갈 일이 없었다. 아니 계약기간이 6개월이 아니라 1년이었다 할지라도 나갈 일이 없었을 것이다. 3월 중순이 되어도 사태는 주춤해지지 않았고 학교는 개학을 할 수 있을지 오리무중이기 때문이었다. 신문의 헤드라인에는 “팬데믹 선언만 남았나…위협이 현실로”라는 문구가 대문짝만 하게 떴다. ‘팬데믹’이 아니고 ‘팬케익’이었으면 오죽 좋으련만. 쓸데없는 아재개그나 떠올리면서 씁쓸하게 웃는 나를 자책해야 했다.

내가 다니는 탁구클럽의 총무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다. 코로나사태로 탁구장을 폐쇄하니 나오지 말라는. 이런,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스매시, 커트, 드라이브 등 탁구의 각종 기술을 연마하고 있던 중이었다.

역시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출구는 지리산밖에 없었다. 내가 지리산을 제일 자주 오르던 때는 2012년 3월부터 8월까지였다. 그때 나는 도시에서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간단한 세간을 챙겨 피아골의 끝 동네인 직전마을의 한 민박집으로 숨어들었다. 지리산에서 살기 위하여 아예 지리산의 품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마침 구례에서 지리산케이블카 반대운동을 하던 활동가들에게 포섭되어 일주일에 한 번 노고단 대피소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나는 손수 밥을 짓고 된장국을 끓여 혼자만의 식사를 하고서 피아골 계곡을 올라 능선을 타고서 노고단까지 가서 한 시간 가량 피켓을 들고 서 있다가 올라간 길을 되짚어 내려오곤 했다. 피아골 계곡을 타고 산에 오를 때 계곡에 흐르는 투명한 물은 내 피를 맑게 했고, 산새들의 울음소리는 도시생활에 찌든 나의 머리를 정화시켰으며, 그때 마침 피어나기 시작하던 생강나무꽃들은 옛 사랑을 아련하게 떠오르게 했다.

어찌어찌 생의 일정을 타고 제주도에서 몇 달을 살다 다시 구례로 돌아와 구례군 토지면, 마산면에서 산 지 벌써 8년이 흘렀다. 고개를 들면 지리산의 차일봉, 종석대, 노고단, 왕시루봉의 연봉들이 내달리는 이 풍경은 세월이 흐르면서 너무도 익숙해졌다. 그런데 소중한 것이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 소중함을 모르게 되는 것일까. 나는 차제에 다시 지리산에 오를 것을 다짐했다.

 

▲ 지리산의 봄 (제공: 김학수)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밥을 먹고 매일처럼 화엄사에 가서 연기암까지 오르곤 했다. 아무 불당에라도 들어가 108배를 올렸다. 속으로 하나부터 백여덟까지를 세면서 여러 생각을 떠올렸다가 지우곤 했다. 백여덟이라는 숫자의 의미도 떠올렸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문자 창제의 취지를 말하고 있는 “國之語音 而乎中國…”으로 시작하는 서문의 글자수는 54자였다. 한문으로 된 원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나랏말ᄊᆞ미 듀ᇰ귁에 달아…”로 바뀐 글자수는 108자였다. 조선은 공식적으로 유교를 국시로 내세운 나라였다. 따라서 아무리 임금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글자 창제의 취지에 불교의 정신을 표면에 내세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세종은 쓸데없는 분란을 차단하기 위하여 한글 창제에 깃든 불교의 정신을 글자수에 절묘하게 숨겨버린 것이다.

다시 이 평화로운 봄날을 침탈해온 역병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내 오장육부가 성해도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만나거나 스치기만 해서 감염될 수도 있다는 이 공포는 실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인간의 부정한 행실에 대해 하늘이 내린 심판은 아닐까. 노아의 방주가 물 심판이고, 소돔과 고모라가 불 심판이라면, 코로나19는 공기 심판이라 해야 하는가.

연기암에서 108배를 올리고 휘적휘적 내려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불가에서 소위 삼독(三毒)이라 하는 탐진치(貪瞋痴)를 인간이 버리지 못해 이런 공포가 전세계에 만연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제 나에게도 스민 세 가지의 독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무엇이 부족해 더 가지려 하는가. 더 가져서 얼마나 호의호식을 해야 성이 찰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 너를 그렇게 분노하게 하는가. 너 또한 너 아닌 누군가에게 분노를 유발한 적이 없는가. 너는 하는 짓마다 어쩌면 그리 어리석은가. 얼마나 책을 읽지 않으면, 얼마나 생각이 얕고 짧으면, 얼마나 스스로 너를 돌아보지 않으면 그리 어리석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마스크 착용, 손 씻기, 기침예절 다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을 우리는 잊고 사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나는 터덜터덜 산길을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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