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중순에 성당에서 사목임원 연수가 있었다. 연수 프로그램 중 하나는 기후위기에 관한 동영상 자료를 시청하고 이를 주제로 토론하는 것이었다. 동영상에서는 5억년 동안의 지질 시대에 지구는 다섯 번의 대멸종을 겪었고 20세기 후반부터 여섯 번째 대멸종이 시작되었는데,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이자 현재의 기후 조건에 최적화되어 있는 인류는 기후가 변함으로써 절멸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영상이 끝나고 모둠을 짜서 토론을 했다. 토론은 당연히 걱정스런 분위기 속에 진행될 거라 기대했지만 사람들은 전혀 충격 받지 않은 듯 했다. 인간 인식의 특성 중에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작은 충격에는 놀라지만 엄청난 충격에는 오히려 담담해지기도 하고, 자신과 관련된 상반되는 견해 중에서는 유리한 쪽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들의 태평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기후 위기에 대해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고 행동에 나서도록 하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까 생각하면 막막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이런 반응 뒤에는 어떤 생각이 숨어 있을까? 우선은 ‘나 죽기 전에 설마 무슨 일 있겠어?’라는 것일 게다. 지지난해 여름 유례없는 무더위에 온열질환으로 병원을 찾았다 사망한 사람이 전국에서 48명이었고 한다. 행정안전부는 같은 시기에 냉방 시설이 불충분한 거처에서 홀로 지내다 병원에 가보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을 160여명으로 추산했다. 그런데 통계청 자료에서는 그 기간에 사망한 숫자가 예년 평균보다 7천 명이나 많았다고 한다. 사망자 모두가 더위 때문에 죽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최근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예에서 보듯 건강의 한계 상황에 처해 있던 많은 이들에게 무더위는 죽음을 촉발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 멸절은 불확정한 미래의 일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사람들이 위기 앞에서 무관심할 수 있는 데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인과관계를 명확히 혼동한 것이다. 과학의 발전을 기반으로 한 기술 발전은 기업의 생산 과정에 적용되어 보다 많은 상품을 생산하는 데 이용됨으로써 에너지 소비를 조장하고 온실가스 배출을 늘리는 데 이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근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은 대부분 기후변화의 원인이지 해결책은 아니었다. 또 전 세계가 걸려 있는 문제에 나 혼자 노력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하는 무력감도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움직이면 세상의 75억분의 1이 ‘실제로’ 변한다. 현재의 위기는 그것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의 평균 기온은 1℃ 올랐는데 그 상승폭이 2℃를 넘기면 지구 시스템 은 온도를 스스로 올리게 되어 있어 인간의 노력으로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현 수준에서 인류가 배출하는 온실가스 양이 10년간 유지된다면 허용된(?) 나머지 1℃를 올리는 데 충분다고 한다. 말하자면 지금부터 10년 동안 인류의 행동 여하에 나와 우리 자손들의 삶이 달려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상 편리와 풍요를 추구하는 현대적인 삶 모두가 명백히 죄악이다.

세월호 비극 이후 골든타임이라는 말이 일반화됐다. 지금부터 10년이 기후위기를 넘길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기후위기비상행동‘이라는 시민단체가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에 기후위기에 대한 정책을 물은 질의서에 답한 내용은 우리를 절망케 한다. 여당인 민주당은 기후위기에 대한 정책 대안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고 거대야당인 미래통합당은 오로지 핵발전 정책의 지속을 되뇔 따름이었다고 한다. 국민 1인당 탄소배출량 세계1위인 기후악당 국가에서 골든타임 10년의 절반을 이들에게 맡겨도 될 것인가.

 

▲ 김계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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