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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란 무엇인가 — 그 욕망의 실현과정
김영곤 조합원  |  72109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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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호] 승인 2020.02.17  10: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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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2. 나의 고백

고3시절, 대학진학을 앞두고 나는 진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꿈은 낭만적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학교 교지에 글을 실어본 적이 있고 국어성적 만큼은 남부럽지 않았으니까 국문과에 진학하여 문필가로서의 꿈을 키우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서울시내 어느 사립대 국문과에 진학하고 싶다는 나의 말에 아버지의 반응은 단호했다. 그는 10명의 자식을 거두어야 해서 돈이 부족하니 서울로 갈려면 등록금이 싼 국립대학을 가면 지원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눈물을 머금고 결정한 곳은 학비도 싸고 내 성적으로 도전 가능한 지방 국립 사범대학이었다. 무슨 학과를 선택하지? 불어교육과로 정했다. 고교에서 불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대학에 가서 적응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고, 다른 학과에 비해 커트라인이 비교적 낮아 합격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때 당시 제2외국어로 불어를 채택한 학교는 전라남도 내에서 광주, 순천, 해남 등 읍단위 이상의 지역에만 소재해 있었기 때문에, 교사발령이 나면 시골벽지나 도서지역으로 귀양살이 갈 일이 없고, 그것도 여학생들이 선호하는 과목이었으니 총각인 나로서는 금상첨화가 아니었겠는가. 그야말로 치밀한 이해타산을 거쳐 내 나름대로는 최적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대학에 합격하여 그럭저럭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실망스럽게도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버렸다. 1979년 당시 국립사범대 졸업자는 정부에서 의무발령을 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는데, 공교롭게 그해부터는 불어교사 자격증 소지자가 학교현장의 소요인원보다 과잉으로 배출되어, 도교육청에서는 발령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나와 같은 처지의 대기자들에게 상치교과로 영어과 수업을 하도록 발령을 내주었다. 시내소재 여자고등학교 근무는 신기루가 되어 사라지고 벽지점수도 없는 시골 중학교가 내 첫 부임지가 되었다. 그 후 군복무를 마치고 복직하여 대학 때의 전공교과를 찾아 전과를 하여 시내소재 여고에서 불어를 가르치는 꿈은 뒤늦게나마 이루었다. 그러나 학생들 사이에서 불어, 독일어가 비인기 교과로 전락하고 일어, 중국어가 각광을 받던 나로서는 불행한 시기를 맞았다. 할 수없이 3년간의 교육대학원을 수료하고 석사학위를 받아 영어2급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영어교사로 전과발령을 받고 근무하다가 퇴임하기에 이르렀다. 재직당시 동료들에게 술자리에서 ‘나는 전과 2범이다’라고 자조적인 고백을 하곤 했다.

그러한 우여곡절을 격어 가며 나는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던가. 한때,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습한 내용을 100% 이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완전학습’ 이라는 교수-학습 모형이 대세를 이룬 적이 있는데 나로서는 그것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가르치는 일이 창피하고 권태로운 직업이라 생각하고 현장을 이탈하여 케케묵은 이론만을 강요하는 교육청 장학사들의 지시에 대한 은근한 반발 심리도 작용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다. 내게는 자연주의 교육사상을 담은 책 ‘에밀(Émile, 장자크 루소, 1712-1778)’의 영향이 크다. 나는 그 책을 ‘학생의 흥미와 개성, 경험을 중시하되 일체의 인위적 구속을 가하지 말라’는 주장으로 읽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영어나 불어를 여러분 모두가 잘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잘하면 좋지만 그럴 수도 없거니와 누구나 외국어를 잘하는 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낭비다. 외국어 공부가 흥미와 적성에 맞고 절박한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될 때 열심히 해라. 그 대신 시험성적은 걱정하지 말고 수업시간 동안만은 집중하고 즐겨라. 여러분의 중.고교 시절이 미래의 어느 때를 위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이 순간 자체가 소중하다.” 단언컨대, 내 교직생활 전 기간에 걸쳐 학생들에게 성적을 이유로 체벌해 본적은 없다. 그 대신 학생들의 개성과 특기를 신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교내 축제활동을 열정을 다해 앞장서 지도했다. 한편으로, 사람은 지나간 자리가 깨끗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청소지도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반면에, 무단결석, 욕설, 거짓말, 폭행, 도벽, 기물파손, 따돌림 등에 대해서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내게는 두 딸이 있다. 내 학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애들에게도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큰 아이가 고교진학을 앞둔 중3시절에 이렇게 물었다. “여수에 사는 고종사촌언니는 여수여고를 졸업했고, 목포에 사는 사촌언니는 목포여고에 다니는데, 순천에 사는 너는 순천여고에 갈 수 있지?” 대답은 울음이었다. 이 말 한마디 던진 이후로 부녀의 사이는 서먹서먹해지고 말았다. 내가 그 아이와 공부에 대해서 나눈 말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큰딸의아기적 사진첩 첫 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너로 하여금 세상이 더욱 아름답거라!’ 이처럼 나는 내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주변을 밝게 변화시키고, 남에게 기쁨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둘째딸이 고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 모의고사를 치르고 귀가하는 그 애에게, “오늘 영어시험은 쉬었냐?” 이렇게 묻자, “아빠, 시험 이야기 하지 마, 그런 말 들으면 토할 것 같아.”라고 잘라 말했다. 나는 딸에게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부러우면 어쩔 수없이 공부해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진로를 선택해도 적극 도와주겠다고 했다. 미용사여도 좋고, 연극배우가 되어도 보람된 일이라고 하면서 격려를 했다. 그 아이가 대학입시 추가합격자 발표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먼저 합격한 친구를 축하해주러 나갔다가 밤 12시가 한참 넘어서야 집에 와서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어보니 술에 잔뜩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한 상태에서 현관 복도바닥에다 마셨던 술을 거꾸로 토해내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며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 네가 드디어 인생의 쓴맛을 알아가는구나.” 두 딸은 스무 살에 각각 서울로 대학진학을 한 후 10년이 지난 서른 살 즈음에 이르러서야 여러 차례의 낙방과 좌절을 딛고 모두 서울에 직장을 얻게 되었다. 결혼 후 이제 손녀딸을 키우고 있는 큰딸과 사위에게는, 아이를 똑똑하게 키우려면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데, 그 방법으로는 여행과 독서가 제일이라고 조언한다. 결론적으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교육방식이라 생각한다.

 

삽화 3. 봉사활동 표창장

내가 기억하는 우리나라 대학입시제도는 시행방법에 따라 3단계로 구분된다. 예비고사 및 대학별 본고사가 처음이고, 학력고사가 뒤를 이으며, 현재는 수능시험 및 학생부 종합전형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예비고사, 본고사, 학력고사와 수능시험은 교과영역의 능력만 측정하는 전형방법이었던 것에 반해, 학생부 종합전형은 내신성적 같은 ‘정량평가’ 뿐만 아니라, 수상, 자격증, 진로, 창의적 체험활동, 교과학습, 독서, 행동발달 등(정성평가) 학교생활기록부의 거의 모든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학생들을 선발하는 전형이다. (定量評價: 숫자로 표시할 수 있는 평가, 定性評價: 내용의 質을 중심으로 업적을 평가) 그런데, 화제가 된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딸이 동양대학교에서 받았다는 ‘봉사활동 표창장’은 정성평가의 대상이 되는 ‘수상경력’에 해당된다. 내가 재직할 당시에는 학생들이 해당 기관에서 발급받은 ‘봉사활동 확인서’를 학생부에 기록했는데 나의 은퇴 후 명칭이 바뀐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서 정성평가의 대상이 되는 수상경력을 놓고 어떻게 우열을 가리느냐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봉사활동참여 시간수도 다다익선이라는 정량평가의 함정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학부모들은 대입을 앞둔 자녀들의 봉사활동 점수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부모가 학생대신 봉사활동에 참여하기, 2시간 활동하고 4시간 활동한 것으로 부풀리기, 학교 내 청소활동 등 교내활동을 봉사시간으로 인정해 주기 등등의 편법이 발생한다. 봉사활동 뿐이겠는가. 대입 전형에 도움이 된다면 모든 학부모들이 인맥, 정보력, 지위, 재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부인할 수없는 현실이다. 대입제도가 어떻게 바뀌어도 학부모들의 교육열은 꺾이지 않는다. 정시모집 비율을 30%에서 40%로 바꾼다는 최근 교육부의 발표도 학부모들의 열기 앞에서는 그 취지가 무색해질 것이다. 그런데, 학부모들이 변화무쌍한 입시제도를 좇아 우왕좌왕 한다고 탓할 수만은 없다. 진학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소위 ‘스펙(spec)’을 많이 쌓아야 한다고 학교에서 교육부에서 언론에서 동시에 엄청나게 떠들어댔던 일을 기억하자. 주어진 제도 하에서 위법한 일이 아니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 경제력과 정보력이 자녀의 진학과 취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내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50년 이상 교분을 유지하고 있는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직업적 싱크로율(synchro率)은 가히 무서울 정도로 높다. 자식들이 대학에서 전공한 학과뿐만 아니라 취업한 업종과 직장 및 직책이 부모와 똑같거나 비슷하다. 이를 두고 볼 때,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유전적인 유사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부모가 지향하는 인위적인 학습과정을 밟아간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 부지불식간에 부모의 기대와 요구가 자녀들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현상이다. 프랑스 속담에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Tel père, tel fils)’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역시 부모자식 사이의 후천적 동질성을 확인시켜준다.

다섯 달 째 검찰에서 수사하고 있는 동양대학교 정경심 교수의 봉사활동 표창장 위조사건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비분강개한다. 한쪽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 다른 한쪽은 너무 가혹하다는 동정심으로. 그러나 모두가 냉정을 찾아야 한다. 재판결과도 아직 안 나왔는데 확인되지 않은 검찰발 언론보도에 우리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 대신 이 사건을 두고 자기 자신을 성찰할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제 끝으로 평등, 공정과 정의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자. 우리가 흔히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상태를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비유하는데, 반대로 평등한 세상은 ‘수평이 맞는 운동장’이라 할 수 있겠다. 내게는 근본적인 질문이 늘 따라다닌다. 조물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수평이 맞는 운동장을 부여하는가? ‘아니다’라는 생각이다. 선천적 장애인들, 태어나자마자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이런 피치 못할 구조 속에서 각자 자기의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욕구가 부딪히면 서로의 이익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일찍이 바보 노무현은 ‘반칙을 하지 않고도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고, 성공했다고 특권을 누리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다.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나의 생각으로는 ‘가치의 다변화’에 답이 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한꺼번에 모두 가지려 하지 말고 그중 하나만을 추구하도록 하게하자. 모든 사람들이 각자 서로 다른 꿈을 꾸도록 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사나 변호사의 수입이 미화원이나 용접공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게 만들면 직업의 귀천이 사라진다. 사회주의자라고 공격받을 여지가 있는 주장이지만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실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영국에서는 대학교수의 연봉이 고교교사보다 많지 않다. 미국에서는 대학진학을 앞둔 고교생들이 연간 학비가 8천만 원이나 되는 하버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연봉으로 1억 원을 받을 수 있는 트럭운전사를 택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고등학교부터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반면, 프랑스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실업계 과정으로 진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진로를 결정하는 담임교사의 조언에 학부모들이 순순히 따른다. 그 이유는 그만큼 교권이 확보되어있기도 하지만 졸업 이후 직종간의 봉급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토가 개성과 특기를 존중하는 교육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이 아닐까?

조물주는 우리를 불평등하게 창조했으나 국가경영의 책임을 맡은 당국자들은 그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그 임무를 수행하도록 국민은 그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것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원칙들을 법제화하여 좌고우면하지 않고 추진하여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자유와 평등(보수와 진보)’은 서로 충돌한다. 프랑스인들은 그 해결책을 만인을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의미의 박애(博愛, fraternité)정신에서 찾는다. 프랑스 국기 ‘삼색기’의 파란색은 자유를, 흰색은 평등을, 빨간색은 박애를 각각 상징하는데, 우리의 태극기에도 그 세 가지 색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민주공화국은 그렇게 서로 다른 것들의 융합 속에서 균형을 이루며 굴러간다. 공정한 세상은 그것을 꿈꾸는 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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