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김계수 농사일기는 이번 호로 컬럼을 중단한다. 그동안 농사일기는 2017년 11월부터 총 30회를 연재했다.

 

농사일을 농부가 자기 존재를 실현하는 과정이라 본다면 농사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자본주의를 생산 관계의 측면에서 규정하자면 그것은 자본(가) 이 임금노동(자)을 고용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체제이다. 이때 자본가는 생산물의 품질 또는 이윤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는 한 생산이 진행되는 과정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자본가는 오직 관리자나 감독자로서 생산 과정에 관심을 가질 따름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와 더불어 생산 노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이 둘은 계급 또는 계층에 관한 의식, 사회적 위신이나 평가, 자기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인식 등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반면에 농사에서 농부는 자본가( 토지나 농기계 소유자)이자 노동자( 일꾼)이다. 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은 ‘보살핌’이라는 농사일의 핵심적인 특성을 대변한다. 제조업에서 노동의 대상은 죽은 것이거나 무생물이어서 ‘보살핌’이라는 특성이 끼어들 여지가 아예 없다.

서비스업에서는 인간이 노동의 주 된 대상이기에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극히 제한적이다. 즉 매우 한정된 시간에 소비자의 특정한 요구에 응하는 것이고, 그것도 결함을 피하고자 하는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보살핌’이다. ‘보살핌’의 궁극적인 목적 또한 노동의 대상에 있기보다는 판매나 이윤의 확대이기 십상이다. 대상과의 분리가 전제된, 잔뜩 웅크린 결합이다.

농사일의 대상은 생명이다. 작물이나 가축에 대한 농부의 ‘보살핌’은 서비스업과는 달리 전면적이다. 농부는 씨 뿌려서 가꾸고 수확에 이르기까지 작물의 전 생애에 걸쳐 온전한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보살핀다. 온도와 물, 영양 등 생명에 필요한 모든 요구에 반응하고 배려해야 한다. 부분적인 반응으로는 온전한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보살핌’은 자가 소비나 판매 수입 등 결과물이 가져다 줄 현실적인 편익에 대한 관심과 는 별개로서 그 이전의 것이다. 농사 일의 이러한 특성은 이윤을 최종 목적으로 하여 치밀한 계산과 기획을 요구하는 자본주의적 덕성과 부합할 수 없다. 대체로 악덕이거나 장애물 이다.

자본가가 이윤의 확대와 자본의 증식(성장이 아니다)을 통해 자기를 실현한다면 농부는 작물의 성장과정에서 보이는 변화를 통해 자신을 확인한다. 농부는 일을 매개로 작물 또는 가축과 온전하게 결합하여 그들에게서 변화와 성장을 끌어냄으로써 비로소 세계를 움직이는 주체가 된다. 자본주의적 노동의 가치는 생산물이 시장에서 판매되었을 때 사후적으로 실현되지만, 농사일은 그 자체로 이미 충족된다. 대상이 온전하게 성장하도록 돕고 보살피는 일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적 측면이다. 농부는 일함으로써 의식하지 않은 채로 선을 행한다. 온전한 농사꾼이라면 작물에 직접적으로 행하는 농사 일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수 없다. 분리는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다.

가족 노동력을 근간으로 적은 농토에서 자급을 주된 목적으로 다양한 작물을 가꾸는 소농의 농사에서 농사일의 위와 같은 본질적 특성은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다. 그 대척점에 최첨단 자본주의적 농업의 생생한 사례로 스마트팜이라는 것이 있다. 외부의 조건을 차단하기 위해 비닐하우스나 온실 등 실내에서 영양이 없는 배지에 작물을 심어두고, 생육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인공지 능으로 제어하고 공급하거나 병해충을 방제하는 시스템이다. 이런 농장에서 모든 것은 생산을 위한 요소이거나 아니면 무의미한 것들이 되고, 이웃은 일꾼이거나 경쟁자가 된다. 무엇이 스마트하다는 것일까. 마땅히 결합해 있어야 할 모든 요소를 스마트하게 분리했다는 말인가. 농사의 목적이 똑똑해졌다는 것인가. 이런 방식으로 딸기를 생산하는 어느 농장 사장님은 연 매출이 10억이라 고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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