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일기-김계수 조합원]

이달 초에 태풍 링링이 이 땅을 훑고 지나갔다. 그 이름이 주는 경쾌하고 밝은 느낌과는 달리 녀석은 엄청난 강풍으로 많은 피해를 남겼다. 세력 범위는 그다지 넓지 않으나 바람이 워낙 강한 데다 우리나라가 태풍의 오른쪽 반경에 있어 피해가 더 클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전날 저녁 비가 이미 시작한 가운데 비닐하우스의 측창을 모두 내리고, 농기계를 안전한 곳에 넣고 창고며 축사의 문을 단단히 잠그고 녀석을 기다렸다. 초저녁부터 나뭇가지를 사정없이 뒤흔드는 바람 소리가 몹시 불안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바람은 어느새 잠잠하다. 녀석의 이동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던 것 같다. 새벽에 일어나 거실 커튼을 열어보니 마당 한켠의 개집은 뚜껑이 날아간 채 넘어져 있고 그 집 주인은 밤새 한데서 비바람을 오롯이 맞고 온몸이 흠뻑 젖은 채 빗물에 눈을 껌벅이며 나를 바라본다. 비바람 속에서도 안락한 밤을 보낸 게 염치없어 금세 커튼을 내린다. 축사와 논밭을 둘러보러 나섰다. 창고나 비닐하우스가 여전하다. 축사도 별 문제가 없다. 예전 같으면 비가 들이쳐 바닥이 질퍽거리고 닭들 날개가 함초롬히 젖어 있었을 텐데, 이번 태풍은 바람에 비해 비를 많이 품지 않은 덕이다.


우리 지역의 명물인 메타세콰이어 길은 바람에 떨어진 잎을 자동차 바퀴가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마치 낙동강 녹조를 퍼다 뿌려놓은 듯하다. 벼논들은 차이가 분명하다. 비료를 많이 줘서 키가 크고 줄기가 부드러운 벼는 논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고, 반쯤 비스듬히 누워있는 논들도 있다. 벼 이삭이 실해져서 고개를 숙이는 시기라 비에 무게가 붙고 바람에 흔들리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이번 태풍이 비가 적어 쓰러진 벼가 걱정한 것보다 많지 않다. 콩이나 들깨 등 밭작물은 꽃피고 여물 들 때가 아직 일러 이리저리 흔들리기는 했으나 큰 피해는 없는 듯하다.


문제는 배추 농사였다. 8월말에 본밭에 내다심은 배추는 벌써 땅 맛이 들고 웃거름을 얻어먹어 이파리가 제법 너울너울해서 지나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냈었다. 그런데 그 넓은 잎들이 이번 태풍의 바람을 맞고 빙빙 돌아 뿌리와 줄기가 따로 놀았다. 이틀 후 쯤 약해진 뿌리로 인해 그 좋던 배추들이 시름시름 주저앉았다. 바람을 많이 타는 논밭의 배추는 남은 게 거의 없고 그나마 절반 정도 남은 농가는 오히려 반색이다. 나는 이달 초하루에 모종을 정식했는데, 잎이 아직 자라지 않아 바람을 타지 않았다. 처음에는 남들보다 늦은 정식에 애가 탔지만 농사일이야말로 새옹지마다.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소득 작물은 딸기 모종 농사다. 딸기는 본래 저온을 좋아하는 작물이라 올 여름 덥지 않은 날씨 덕에 다른 지역의 모종 농사가 비교적 순조로웠던 모양이다. 당연히 우리 지역의 딸기 모종 판매가 예년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번 태풍이 다른 지역의 딸기 모종을 망쳐버려 망외의 주문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비가 적어 침수 피해가 없었던 탓에 사람들의 음울한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수요가 한정된 특수 작목의 현실이자 우리 농사의 슬픈 자화상이다.


어제 내가 다니는 성당에 광주대교구 주교님의 사목방문이 있었다. 미사 후에 성당 식구들과 점심을 먹고 주교님과의 간담회가 있었다. 임박한 지구의 기후 위기를 교구는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고 있는지 질문했다. 일회용품과 플라스틱 물품 소비 자제, 태양광발전 등 신재생에너지 시설을 장려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핵심은 현대인들의 물질생활에서 욕망을 획기적으로 절제하는 일일진대, 교계의 대응은 핵심의 먼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듯하다. 많은 신자와 정기적인 미사, 강론 등 강력한 교육·선전 기능을 갖춘 조직의 순진한 인식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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